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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가 쓴 소설: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Killing a Messiah: A Novel’)를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점은 신학자의 소설가적 재능이었다. 신학 책을 쓴다는 것과 소설을 쓴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글쓰기인데, 프로테스탄트 신학교(University of Mary Hardin-Baylor College of Christian Studies.) 교수인 Adam Winn은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재능은 철학자인 나에게 일종의 부러움을 유발하였다. 이는 성경이 말하지 못하거나 이론이 분분한 사건의 틈새를 저자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는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을 통하여 풀어내고 있다. 나에게 가장 큰 미스터리는 군중의 돌변이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옷을 길바닥에 깔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쳤다. 이들은 예수를 왕으로, 메시아로 환영하였다.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군중이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오 복음 21: 8~11), (병행구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르 11,1-11, 루카 19,28-38, 요한 12,12-19)

 

예수를 메시아로 환영하던 군중은 불과 며칠 만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모습으로 돌변하였다.(마태오 27: 23, 마르코 15: 13, 루카 23: 21, 요한 19: 15) 성경은 군중의 돌변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아담 윈은 전자와 후자의 군중이 다른 군중이라고 해석한다. 후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사이들에 의해 동원된 군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아담 윈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죄인으로서 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극복하고자 한다.(‘예수의 죽음과 유대주의의 역사’,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 pp. 332~336. 참고)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또 다른 미스터리는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무관심과 무죄 주장이다. 최고조의 긴장감이 도는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왕으로 입성하고,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심각한 갈등을 유발한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무관심과 무죄 선언은 석연치 않다. 이를 아담 윈은 빌라도가 예수를 직접 체포, 유죄 판결했을 때에 유발될 정치적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합의를 통해 사전에 계획했던 작전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로써 빌라도는 정치적 부담의 회피와 더불어 예수 제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얻었다는 것이다.

아담 윈은 소설의 에피로그에 해당하는 저자의 말에서 자신의 소설의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내러티브가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상충한다고, 혹은 어떤 면에서 복음서의 주장을 훼손한다고 염려할지도 모른다. 이는 내가 의도했던 목표와 완전히 동떨어진 염려다.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그리고 있는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죽음의 배경이 되는 사회·정치 현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 현실을 좀 더 잘 알 수 있게 도우려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상세한 내용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한 역사적 기술이 아니며, 그런 의도로 기록되지도 않았다. 각 복음서는 저마다의 목적을 갖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그리고 있으며, 그래서 복음서마다 예수의 죽음을 약간씩 다르게 묘사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당시 사회·정치 정황에 관해 독자가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많은 부분을 기록해 나가는데, 사실 대다수 현대 독자들에게는 그런 정보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 적어도 몇 가지 정보는 솔직히 복음서 기자들도 알지 못한 정보였다. 그래서, 신약성경 복음서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는 최고의 역사자료이기는 하지만, 복음서가 그리는 역사를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추가 작업이 필수적이다. 내가 창작해낸 내러티브는 바로 그렇게 분석하고 재구성한 내용을 반영한다.”(‘저자의 말’, pp. 325~326, 강조는 이글의 저자)

 

아담 윈의 소설은 내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갖고 있던 의문들을 해소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말처럼 성경은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역사서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신학적, 문학적 비평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을 역사서이자 과학서로 오인하여 성경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는 시대착오적인 문자주의의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이러한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소수자를 축복한 임보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섬돌향린교회)를 규탄하는 예장합동을 포함해 8개 교단의 이단대책위원장협의회의 주장은 문자주의적 오류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죄악이지 인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역겨운 짓이다.”(레위기 18: 22)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로마서 1: 26~27)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도 우상 숭배자도 간음하는 자도 남창도 비역하는 자도,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 주정꾼도 중상꾼도 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1코린 6,9~10)”

 

불륜을 저지르는 자, 비역하는 자, 인신매매를 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증언을 하는 자, 그리고 그 밖에 무엇이든 건전한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 때문에 있다는 것입니다.”(1티모 1,10)

 

여기서 비역하는 자의 영어번역은 ‘prcticing homosexuals’이다.

(가톨릭 성경, https://bible.cbck.or.kr/)

 

문자주의의 주장이 합리성을 얻으려면 동성애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구절들도 지켜야 한다. 예를 들면 여성 목사(권사, 집사)제도 금지(임보라 목사는 여성이다.), 여성의 교회에서의 미사포 착용의무화, 땋은 머리 금지, 금귀고리 착용도 금지해야 한다. 성경에 그렇게 씌여있기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하듯이 여자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보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1. 코린토 14:34~35)

 

그러나 어떠한 여자든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의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자는 머리가 깎인 여자와 똑같습니다.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으려면 아예 머리를 밀어 버리십시오. 머리를 밀거나 깎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면 머리를 가리십시오.”(1 코린토 11: 5~6)

 

머리를 땋아 올리거나 금붙이를 달거나 좋은 옷을 차려입거나 하는 겉치장을 하지 말고,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과 같이 썩지 않는 것으로, 마음속에 감추어진 자신을 치장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귀중한 것입니다.”(1 베드로 3: 3~4).”

 

문자주의는 강한 믿음의 표식이 아니라 지적, 신앙적 게으름의 표시이다. 깨어있지 못하는 게으름이야말로 죄악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스콜라철학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이성과 신앙은 항상 필수적인 두 날개이었다. 둘 중에서 하나를 무시하면 오류에 빠진다, 전자를 무시하면 이성 없는 신앙이라는 비이성적 문자주의의 오류에, 후자를 무시하면 신앙 없는 합리성이라는 독단적 이성주의의 오류에 빠지게된다. 많은 경우 문자주의는(시위현장에 이스라엘 깃발을 들고 나오는) 맹목적 보수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반이성적 맹목을 신앙으로 오해하는 문자주의적 오류가 만연한 한국사회에 아담 윈의 작품과 같은 작업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